EPISODE 02

잔고의 가격

돈을 받는 순간, 증거는 준호의 죄가 된다.

5분 · 현대판타지 · 직장인 능력물 · 오피스 복수극
한밤의 사무실에서 미래 잔고를 확인하는 금융 분석가와 취재 기자

자정이 지나자 메리트페이에서 퇴직 합의서가 도착했다. 열여덟 쪽짜리 문서의 서명 기한은 오전 여덟 시 삼십 분. 준호의 내일 잔고가 입금되는 시각보다 삼십 분 빨랐다.

준호는 지하철역 무인 출력기 앞에 섰다. 젖은 셔츠 소매에서 빗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휴대전화 화면으로 읽으면 놓칠 것 같았다. 회사는 사람이 지칠 때 가장 비싼 문장을 숨겼다.

아홉 번째 쪽 하단, 글자 크기 8포인트. 합의금 수령인은 내부 정산 오류에 대한 관리 책임을 인정한다. 열네 번째 쪽에는 비밀유지 의무가, 마지막 쪽에는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있었다.

준호

천팔백칠십만 원을 받는 순간, 187억 원의 마지막 관리자가 내가 됩니다.

서린

서명하지 마요. 입막음 돈도 아니에요. 횡령액을 당신 계좌에 한 번 묻히려는 겁니다.

서린은 역 건너편 스물네 시간 카페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 카메라에는 검은 테이프가 붙어 있었고, 테이블 위 녹음기는 배터리도 뺀 상태였다.

준호

서명하지 않으면 앱도 닫힙니다. 저 돈이 어디서 오는지 더는 못 봐요.

준호가 전자서명 창의 거절 버튼에 손가락을 올렸다. 내일의 잔고가 18,708,420원에서 8,420원으로 떨어졌다. 대신 화면 아래에 낯선 입금 한 줄이 밀려 올라왔다.

오전 08:40 · 미수령 급여 반환 · 8,700,000원

조건은 합의서 서명이 아니었다. 준호가 원장을 어느 기관에 보내느냐에 따라 미래가 다시 계산되고 있었다.

메모리 카드를 인터넷이 끊긴 노트북에 꽂았다. 화면을 채운 것은 계좌번호가 아니라 사람 이름이었다. 계약 종료, 권고사직, 수습 해지. 이름마다 마지막 달 급여가 같은 코드로 빠져나갔다.

서린

몇 명이에요?

준호

삼백열일곱 명. 퇴직금까지 합치면 187억과 맞습니다.

서린이 숨을 들이켰다. 여섯 달 동안 받은 제보가 마흔두 건이었다. 원장에는 그보다 일곱 배 많은 사람이 있었다.

서린

기사는 내가 써요. 준호 씨는 이 숫자가 거짓말하지 못하게 원본 검증값부터 뽑아요.

새벽 세 시 십칠 분, 둘은 급여 합계와 출금 계좌를 한 줄씩 맞췄다. 준호는 커피 대신 미지근한 물을 마셨다. 손끝이 떨릴 때마다 첫 줄로 돌아갔다.

오전 네 시 정각. 삼백열일곱 개 행 가운데 단 하나만 공제액이 0원이었다. 재무팀 박대리. 원장을 삭제할 수 있는 마지막 실무 계정이었다.

준호

이 사람만 돈을 받았습니다. 공범이거나, 돈을 받고 입을 막힌 겁니다.

서린이 박대리 번호를 누르려는 순간 준호의 은행 앱이 울렸다. 내일의 잔고가 8,708,420원으로 올라갔다.

예정 입금 · 8,700,000원 · 출처: 박성민 급여

같은 시각, 원장의 박대리 지급 예정액이 0원으로 바뀌었다. 준호는 자기 화면과 원장을 나란히 놓았다. 앱은 돈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었다. 누가 받게 될지를 바꾸고 있었다.

박대리에게서 먼저 전화가 왔다.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금속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서린

박성민 씨, 지금 어디예요?

통화 너머로 남자의 숨이 두 번 끊겼다.

“제 월급을 가져간 사람이 서준호 씨로 찍혔습니다. 회사에서 지금 당신을 잡으러 갔어요.”
당신의 선택

박대리의 몫까지 되찾을까?

NEXT SIGNAL

오전 아홉 시, 준호의 통장에 870만 원이 들어왔다. 입금과 동시에 앱에는 경고가 떴다. “오늘 얻은 돈만큼 누군가의 내일이 줄었습니다.”